러시아의 대규모 건설 수요 확대 속에서 북측 노동력이 투입된다는 보도와 의혹이 이어지면서, 폐쇄적 고용 구조와 다단계 하청이 ‘노예 같은’ 노동조건을 낳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 글은 정치적 입장보다 구조적 사실에 초점을 맞춰, 노동력 수급 메커니즘, 임금·생활비 공제 등 착취의 경로, 그리고 국제 인권 기준에 비추어 필요한 대응과 점검 항목을 정리한다.
노동력: 전쟁특수가 만든 수요와 건설 현장의 구조
전쟁특수는 단기간에 대규모 인력 수요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주거·물류·군사 인프라 증설이 동시에 진행되면, 숙련공과 단순 노무가 모두 부족해진다. 러시아의 광범위한 영토, 기후 조건, 고립된 현장 특성은 노동력의 ‘고립-의존’도를 높이고, 이는 외부 견제 없이 장시간 노동을 관성화시키는 토양이 된다. 건설 현장은 본질적으로 다단계 하청 구조를 띠는데, 발주-총괄시공-1·2차 하청-브로커-작업반장으로 이어지는 고리에서 계약과 책임이 분절된다. 이때 최하위 고리는 통상 단기 구두계약, 성과물량 기준의 임금체계, 안전장비 자체 조달 같은 불안정한 조건에 놓인다. 숙소는 현장 컨테이너·기숙형태가 많고, 난방·급수·위생이 열악하면 감염성 질환, 근골격계 질환, 동상·화상 등의 위험이 높아진다.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과 여름철 열파는 노동안전의 설계 기준을 바꿀 정도로 강력한 스트레스 요인이다.
노동력 확보 메커니즘도 취약점을 안고 있다. 여권·출입증·근로증의 보관 주체가 노동자 본인이 아닌 상급자나 관리자일 경우, 이동의 자유가 사실상 제한되고 탈출·이직의 비용이 치솟는다. 교대제 운영이 불규칙하고, 야간·연장노동이 상시화되면서 달력상 휴식일이 기록상 존재하더라도 실제 회복은 어렵다. 안전교육·장비 지급이 형식화되면, 크레인·거푸집·고소작업·용접 등 고위험 공정에서 사고확률이 급증한다. 언어 장벽 역시 위험 요소다. 비상시 안내·표지·지시 체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대피와 구호가 지연된다. ‘성과물량-벌금’ 시스템은 품질과 안전보다 속도를 우선하도록 압박하고, 공정 간 충돌(철근-전기-마감)이 잦은 현장에서는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경제적 동기는 복합적이다. 본국 가족에게 송금해야 하는 압박, 채용 과정에서 발생한 수수료·차입, 브로커 비용 상환은 ‘빚을 갚기 전에는 그만둘 수 없다’는 심리를 강화한다. 노동자가 현금·카드·통신 수단에 접근하기 어렵거나, 급여 수령·송금이 제3자의 통제하에 있으면 의존 구조는 더 심화된다. 공정·공구·자재의 부족으로 비가동 시간이 길어지면, 물량제 노동자는 수입 불안정 때문에 더 많은 위험을 감수해 작업 속도를 끌어올리려 할 가능성이 커진다. 결과적으로 전쟁특수가 만든 인력 수급의 불균형과 현장 구조의 불투명성, 그리고 고립된 생활환경이 결합해, 노동자의 자율 선택권과 협상력을 체계적으로 약화시키는 토대가 된다.
착취: 임금·공제·통제의 메커니즘과 ‘노예 같은’ 조건
착취는 대개 여러 개의 얇은 층으로 쌓인다. 첫 층은 임금 공제다. 숙식·안전장비·통근 차량·비자·의료비 명목으로 과다 공제가 이루어지면, 명목임금과 실수령액의 격차가 급격히 벌어진다. 급여 지급이 현지 통화로만 이뤄지고 본국 송금은 특정 창구를 통해서만 가능할 때, 불리한 환율과 높은 수수료가 추가 착취의 통로가 된다. 두 번째 층은 지연과 차감이다. 지각·불량·사고 등을 이유로 한 벌금제와 검사·검수에서의 과도한 감가가 반복되면, 노동자는 얼마를 벌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세 번째 층은 문서와 이동의 통제다. 여권·근로증·출입증을 관리자나 반장이 보관하고, 출입·외출·이직에 상급자 승인이나 벌금을 요구하는 관행은 사실상 강제력으로 기능한다. 네 번째 층은 채무다. 채용 수수료, 이동비, 브로커 커미션을 선지급 받았거나 빌렸을 경우, 빚이 갚아질 때까지 자유로운 퇴사가 봉쇄된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제시하는 강제노동의 지표—협박·신체·성적 폭력, 감금, 문서압류, 임금지불의 지연·박탈, 과도한 초과근로, 제한된 이동, 기만적 채용, 빚의 예속, 생활환경 열악화, 위신 손상, 위협—중 복수 항목이 겹치면, 법률상 ‘강제노동’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건설 현장은 안전이 착취 메커니즘과 맞물린다. 위험수당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거나, 사고가 발생해도 산재 보고를 회피하도록 압박받는다면, 노동자는 치료·보상·복귀의 권리를 잃는다. ‘그만두면 못 받는다’는 조건부 임금, 집단 기숙사에서의 상시 감시, 통신수단 제한은 심리적 통제를 강화한다. 노동자가 ‘노예처럼 일한다’는 표현은 법률적 개념이 아닌 비유지만, 인권 규범의 관점에서 보면 선택권의 봉쇄와 처벌의 위협이 결합된 상황—예컨대 “퇴사·이직 시 체류자격 박탈·벌금·폭력의 위협”—이 있다면 비유가 현실을 가까이 비춘다고 할 수 있다.
착취 구조는 공급망의 설계와도 직결된다. 발주처가 비현실적 공기·단가를 제시하고, 총괄·하청이 이를 맞추기 위해 인건비를 짜내면, 마지막 고리의 노동자가 충격을 받는다. 계약서가 하위 단계로 갈수록 불투명해지고, 언어·법률 지원이 부재할수록, 권리구제는 멀어진다.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국제사회는 채용수수료 금지(Employer Pays Principle), 임금 디지털 지급, 자유로운 여권 보관, 독립적 제보채널을 권고한다. 기업과 발주처는 인권실사(HRDD)를 통해 채용·숙소·임금·안전·이동 자유 등 핵심 지표를 점검하고, 위반에 대한 시정명령·거래중단·피해자 보상 계획을 포함한 시정조치(CAP)를 마련해야 한다. 언론·시민단체·감사기관은 증거의 안전한 수집—익명 인터뷰, 패턴 데이터, 임금명세 사진 등—과 2차 피해 방지를 병행해야 한다.
인권: 국제규범, 보호장치, 그리고 현실적 개입
인권의 잣대는 이미 마련돼 있다. ILO 핵심협약(특히 제29호·제105호 강제노동 금지), 세계인권선언, 시민적·정치적 권리규약(ICCPR),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규약(ICESCR), 유엔 기업과 인권 이행원칙(UNGPs)은 국경 밖 노동자라 하더라도 기본권—자유, 안전, 공정한 임금, 적정한 주거·의료, 단결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또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는 특정 국가 노동자의 해외 파견과 관련해 제재·감시를 규정해 왔다(예: 결의 2397 등). 이 규범들은 법제·정책·조달·기업관행의 기준점이 된다.
첫째, 보호장치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숙소 기준(온열·한랭 스트레스 완화, 위생·수질, 프라이버시), 식사(칼로리·영양), 작업복·보호구(추위·낙하·절단·호흡 보호), 비상대응(응급약품·구급·이송) 등은 문서화된 체크리스트로 상시 점검해야 한다. 임금은 디지털 계좌로 월 1회 이상 정시 지급하고, 명세서에 공제 항목을 명확히 표시한다. 여권·개인 서류는 본인 보관이 원칙이며, 보관 지원이 필요하면 자발적 위탁·즉시 반환 절차를 갖춘다. 이동의 자유, 휴식·유급휴가, 병가, 의료 접근권은 계약서에 언어별로 명시하고 서명 전에 설명·질의응답을 제공한다.
둘째, 제보와 구제 경로를 열린 채로 유지한다. 익명 핫라인, 외부 옴부즈만, 현장 게시판, QR 기반 다국어 신고 채널을 제공하고, 제보자에 대한 불이익 금지 조항을 계약상 의무로 부과한다. 사건 발생 시에는 신속 조사·시정조치·피해자 지원(치료·임금정산·이주·귀환 지원)의 프로토콜을 발동한다. 집단적 구제가 필요한 사안(임금 체불, 집단 공제)에서는 표준화된 보상 테이블과 독립적 감독 하에 정산을 마무리한다.
셋째, 조달·투자에서의 인권조건화를 강화한다. 공공·민간 발주처는 입찰 단계에서 인권 위험 평가를 실시하고, 계약에 인권 이행 조항, 현장 접근권, 독립적 감시 수용, 위반 시 계약해지·벌금을 명문화한다. 금융사는 대출·투자 조건으로 노동권 실사와 사고 보고를 요구하고, 위반 기업에 대해 금리 가산·거래 축소·투자 철회 등 금융적 신호를 보낸다.
넷째, 정보의 비대칭을 줄이는 기술적 수단을 활용한다. 다국어 교육·안전영상, 임금명세 모바일 발급, 전자서명 계약, 위치·시간 기반 안전 점검(프라이버시 보호 설계 전제), 건강 모니터링(자발적·비식별 데이터) 등은 권리 인지와 자가보호 역량을 높인다. 단, 감시가 통제로 변질되지 않도록 ‘목적 제한·최소 수집·동의·철회’ 원칙을 지켜야 한다.
다섯째, 출구와 회복을 준비한다. 귀환을 원하는 노동자에게 안전한 이동, 미지급 임금 정산, 피해 기록 보관, 재취업 연결을 제공해야 하며, 현지에서 잔류를 원하는 경우에는 체류·취업 자격의 합법적 전환과 법률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 인권침해가 확인된 프로젝트의 경우, 재발 방지 교육과 관리자 교체, 브로커 계약 해지, 공정 재설계 등 구조적 교정 없이는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증거와 절차의 정합성이다. 폐쇄적 환경에서의 증언은 위험을 수반하므로, 조사·보도·캠페인은 당사자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 사실 검증은 다원적 출처(임금명세, 메시지 기록, 사진·동영상의 메타데이터, 위성사진 등)를 교차 확인하고, 특정 개인·집단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정보는 익명화한다. 인권은 선언이 아니라 설계와 검증의 문제이며, 설계가 바뀔 때만 현장의 실천이 달라진다.
전쟁특수가 만든 수요, 다단계 하청, 고립된 생활이 겹치면 노동자의 선택권과 협상력은 빠르게 소진된다. 임금 공제·문서 압류·이동 제한 같은 지표가 포착되면 강제노동 위험 신호다. 발주처·기업·금융·감독기관은 인권실사와 시정조치를 계약·조달·투자에 의무화하고, 현장은 임금의 투명 지급·여권 본인 보관·독립 제보채널을 즉시 도입해야 한다. 안전과 존엄을 담보하지 못한 성장에는 지속가능성이 없다. 지금, 설계를 바꾸자.